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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분노하되, ‘절제된 분노’를

인간이 분노한다는 것은 자존감과 정의감을 갖고 살고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인간은 모욕감을 느꼈을 때, 혹은 정의가 훼손당하는 현실을 접했을 때 분노하곤 한다. 그러하기에 분노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깨어 있는 삶을 살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더구나 모진 세월을 만났을 때 우리에게 분노의 감정은 일상화되어버린다. 세월호에 탄 어린 것들을 수장시켜버린 정부의 무능함에, 그 진상과 책임을 가리는 일조차 회피하는 권력의 행태에 우리는 분노한다. 대통령에 대한 모독을 막기 위해 국민을 대상으로 사이버 검열을 하겠다고 나서고, 국민의 항의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이 들여다보겠다는 오기에 또한 분노하게 된다. 이 모든 일들이 쌓이고 쌓여 우리의 존재를 욕되게 만들기에 우리는 매일같이 분노하며 살아가고 있다. 분노의 세월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흉상

그러나 우리 앞에는 분노의 딜레마가 놓여 있다. 분노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분노는 세상을 바꾸는 출발점이 될 수는 있지만, 분노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우리는 수없이 경험해왔다. 절제되지 못한 채 과잉으로 표출되는 분노가 종종 주위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을 멀리 쫓아버리는 결과를 낳았음도 익히 알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땅히 분노해야 될 일에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고 노예와 다름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지나친 분노에 대해서는 우려하며 중용을 따르는 분노가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모욕에 대해 너무 강하지 않으면서도 너무 무감각하지도 않은 온화한 분노의 가능성을 말한 것이다. 지나친 분노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자칫 원한감정’(ressentiment)이 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니체가 말한 원한감정은 자신의 복종이 가져오는 고통스러움의 해결책을 분노를 표출하는 데서 찾는 것이다. 원한감정이 문제가 되는 것은 분노는 표출하지만, 자신의 고통을 잊으려고만 할 뿐이어서 근원적인 치유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의로움에서 출발했던 분노가 증오의 감정으로 표현될 때 결코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되지 못함을 우리는 지켜보아 왔다.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동안 진보진영을 주도해 왔던 문화에도 일대 성찰이 필요하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은 마땅히 분노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18대 대선을 개표조작 선거로 규정하는 모습들, 세월호 참사를 낳은 정부의 무능은 분노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고의로 학살한 것이라는 식의 주장들, 이 모두 국민의 공감을 얻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한 분노적 언술들이다. 국민과의 거리만 멀게 할 뿐이다. 같은 야권 내에서도 정치적 노선이나 계파가 다르다고 해서 저주를 퍼부으며 총질해대는 정치문화도 국민의 혐오증만을 불러일으키는 분열적 자살행위이다. 문제는 그러한 문화에 대한 자성과 비판보다는 방관적 침묵이 진보층 내부를 덮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뢰의 위기를 자초하는 비겁한 침묵이다. 

분노하되 절제된 분노가 되어야 한다. 분노한 얼굴로는 자기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지지는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는 어렵다. 나의 분노에 대한 공감이 절실할수록 분노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신뢰할 수 있는 책임지는 진보, 인간의 얼굴을 한 따뜻한 진보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이 가야 할 길이다. 

* <주간경향>에도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