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자신이 책임을 통감하며 고개를 숙여야 할 일에 다른 사람들을 질책하고 화를 내는 모습.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때도, 인사 참사가 반복될 때도, 그리고 세월호 참사 때도 대통령은 언제나 남의 탓만 하면서 화를 냈다. 이번에도 대통령은 보란 듯이 화를 냈다. 그리고 국기문란을 말했고 일벌백계를 말했다.
사진= 청와대 홈페이지
하지만 어째서 국민이 ‘정윤회 보고서’ 파문을 놓고 화를 내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아야 하는가. 이치에도 맞지 않고 경우가 없는 일이다. 보고서의 진위, 그리고 유출과정을 둘러싸고 대통령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이 갈등을 빚고 ‘암투’를 벌이고 있는 상황 아닌가. 한편에는 조응천 전 공직기강비서관, 다른 한편에는 정윤회 씨와 ‘문고리 권력 3인방’이 서서 맞대결을 벌이고 있다. 이 무슨, 때 아닌 난리인가. 그렇게도 경제와 민생을 강조하던 청와대 핵심부에서 권력암투라니,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 앞에 머리숙이며 사과했어야 했다. 자신의 주변에서 이런 갈등이 빚어져 국정혼돈을 야기한데 대해 대통령으로서의 책임을 통감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화를 낼 자격이 없었는데도 국민 보라고 화를 냈다. 그의 첫 번째 잘못이었다.
박 대통령의 두 번째 잘못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정윤회 씨의 결백이라는 결론을 내버리고 검찰수사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정윤회 씨의 국정개입 의혹은 그렇게 한마디로 일축해버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청와대에 근무하던 검찰-경찰 엘리트가, 그것도 정윤회라는 대통령의 측근 인물에 대해 날조된 찌라시를 작성해서 윗선에 보고한다는 것은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보고서 작성에 관련되었던 박모 경정과 조응천 전 비서관이 청와대를 나가게 되고 민정수석실에 좌천성 인사태풍이 불어닥친 정황 등, 정윤회 씨의 파워를 짐작하게 하는 일들이 속속 알려지고 있다. 정윤회 씨 부부가 청와대와 문체부 등을 통해 승마협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결국 문체부 담당 국장과 과장에 대한 좌천성 인사가 이루어졌으며 이 인사에 박 대통령이 직접 개입했다는 보도까지 나오고 있다. 문고리 3인방 쪽에서는 보고서의 내용에 대해 “팩트는 제로”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조 전 비서관은 “6할 이상의 신빙성이 있다”고 반박하고 있는 상황이다.
갈등 당사자들 간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으며, 실제로 정윤회 씨와 관련된 여러 의문의 정황들이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나서서 사실상 정윤회 씨의 손을 들어준 모습을 보인 것은 부적절한 일이다. 이 사안에 대해 박 대통령이 누구로부터 어떤 내용의 보고를 받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윤회 씨의 국정개입 여부에 대한 판단은 대통령의 호.불호에 따라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최소한 제기되고 있는 의혹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있은 이후에야 대통령이 자신의 판단을 내놓는 것이 옳은 일이다.
‘국기문란’이라는 표현이 단지 청와대 문서 유출에 국한되어서 사용될 것은 아니다. 청와대 문서의 대량 유출 사태가 있었음에도 이를 덮어버린 일, 무엇보다 아무런 공직을 맡지 않은 개인이 청와대 비서관들을 통해 국정개입을 한 사실이 있다면 그보다 더한 국기문란이 어디 있겠는가. 지금 청와대와 검찰은 ‘정윤회 보고서’의 작성과 유출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인물들에 대한 응징을 하려는 모습이다. 그러나 차제에 정윤회 씨와 관련된 모든 의혹에 대해서도 철저히 조사하여 국민 앞에 숨김없이 실체를 공개해야 한다. 차제에 정윤회 씨와 문고리 3인방의 문제를 정리하지 않는다면 그 부담은 누구보다도 박 대통령 자신의 몫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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