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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문재인의 귀환을 바라보며

그들만의 리그는 끝났다. 비판보다 무서운 것이 무관심이라더니 새정치민주연합의 2·8 전당대회는 영락없이 그 모습이었다. 후보들끼리는 서로 ‘저질’이라며 갈 데까지 가는 모습을 보였건만, 싸움구경 좋아한다는 세상조차도 이 싸움에는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았다. 민심을 먹고살아야 하는 야당에는 참담한 벽이었다. 그래서 지금 문재인 새 대표에게 축하의 말부터 건네는 것은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행위일 뿐이다. 차라리 터놓고 말하는 것이 그를 진심으로 대하는 모습이 될 것이다.

 

문 대표는 “대표가 되면 계파의 기역(ㄱ)자도 안 나오도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2012년에도, 대선에서 패배한 이후로도, 아니 경선 룰 변경이 있던 투표 전날까지도 나왔던 계파의 기역자가 문재인 ‘대표’가 되었다고 해서 없어질 수 있을까. 의심에 찬 기우일 뿐인가? 그동안 문 대표가 보여온 결정적 한계는 선제적으로 큰 흐름을 만들어가는 정치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택했던 것은 언제나 안전한 행보였다. 의원직을 던지지 않은 대선 후보로 남은 것도, 내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것도 모두 최악의 상황을 피하려는 ‘살길 찾기’로 비쳐졌다. 문 대표는 정치를 시작한 이래 ‘내려놓겠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내려놓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런 정치로는 국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문제는 이제부터이다. 문 대표가 사망 직전의 야당을 살려내려면 자신이 먼저 대표로서의 책임만 남기고 모든 정치적 권리와 기득권을 남김없이 내려놓는 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야당 내에서 계파의 기역자도 안 나오게 하는 길도,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길도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계파의 수장, 정파의 대표에서 벗어나, 대의를 위해 자신마저도 버릴 수 있는 모습을 보일 때 야당도 살고 자신도 살 수 있다. 결국은 ‘문재인 대 문재인’의 싸움이다.

박근혜 정부와의 전면전을 선포하며 결기를 보이는 것은 야당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전쟁 이전에 정치로 마음을 얻어야 한다. 국민의 지지 위에 서는 ‘강력한 야당’은 ‘싸우는 야당’ 이상의 훨씬 넓은 친화력과 능력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쉬운 길이 아니다. 하지만 그 길에서 실패한다면 문 대표에게는 2017년이 있을 수 없다.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남겨두는 것 없이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이유이다.

망각하지 않기 위해 아픈 기억을 들추어내자. 2012년 총선에서 민주당은 질래야 질 수 없는 선거를 졌다. 같은 해 대선에서도 이길 수 있었던 선거를 또 지고 말았다. 역사의 죄인들이었다. 그들이 권력욕을 내려놓고 대의를 위해 자기를 버리는 길을 택했던들, 아마도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레임덕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에도, 내년 총선에서 또다시 부실한 야당이 여당에 기사회생의 승리를 선사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진작부터 고개를 들고 있다.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이렇게 말했다. “헤겔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인물은 두번 반복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빠뜨린 것이 있다. 첫번째는 비극으로, 두번째는 희극으로 반복된다.” 상상하기도 끔찍하지만, 2012년의 패배가 5년의 시간이 지난 뒤에도 똑같은 모양으로 반복된다면 그 장면은 차라리 희극이 되고 말 것이다. 새 출발에 초를 치려는 얘기가 아니다. 간절한 호소이다. 망각하고 있지 않기에 지켜볼 것이다. 더는 당신들이 살기 위해 국민을 죽이지 말고, 국민을 살리기 위해 당신들은 기꺼이 죽는 길을 가기 바란다. 문재인 대표의 건투를 진심으로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