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플리 증후군'이라는 정신질환이 있다. 자신이 지어낸 거짓말의 세계를 진실이라고 믿는 일종의 망상 장애이다. 주로 성취욕구는 강하지만 무능력한 개인이 자기 현실을 부정하며 자신을 다른 가상의 인물로 만들어 거짓말을 반복하다 마침내 그것이 정말로 실제 자신이라고 믿어버리게 된다. 이 병의 환자들은 일반인들이 거짓말을 할 때 느끼는 불안이나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도 결여된다. 리플리 증후군은 알랭 들롱 주연의 영화 <태양은 가득히>의 소재로 등장하기도 했다.
요즘 해킹 의혹에 대해 믿어달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는 국정원의 모습을 보면서 번번히 거짓말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태연하게 해왔던 국정원의 역사를 떠올리게 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국정원 대선개입 댓글 사건이나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 때에도 국정원은 사실무근이라며 펄쩍 뛰었다. 그러나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의 끈질긴 추적 끝에 진상은 드러났고 범죄행위 관련자들은 법의 심판대 위에 올랐다. 그런 전력을 가진 국정원은 이번에도 믿어달라, 아니 믿으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믿을 수밖에 없도록 할 아무런 자료도 제시하지 않은채 말이다.
국정원은 국가기밀이기에 자료를 보여줄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 진실성은 어디에서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 대신 국회 정보위원들이 현장 방문해서 확인하고 가면 되는 것 아니냐는 식의 말은, 국회와 국민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말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민간 전문가의 출입조차 불가능한 현장에서 국회의원들이 몇 시간 둘러보고 온다고 무슨 기록 확인이 가능하겠는가. 진상규명에 협력하려는 의사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당초 자살한 임 과장를 ‘단순 기술자’라고 했던 국정원은 이제 “모든 일은 임 과장의 주도로 했고 임 과장이 모든 책임을 졌는데 사망으로 상당 부분 알 수 없게 됐다”고 하고 있다. 해킹 프로그램의 구입과 사용이라는 중대한 일을 국정원의 일개 사무관급 담당자가 주도했다고 하니 그 말을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가 죽어서 이제는 알 수 없게 되었다니. 일개 실무 담당자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고 진상을 덮어버리려 한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국정원 출신의 정보위원회 여당 간사는 더 나아가 “로그파일을 전부 공개하면 목숨을 잃는 사람이 생긴다”고 겁박했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사람이 들어있다”고도 했다. 혼자서 국정원으로부터 무슨 내용을 보고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면 다치니까 알려고 하지도 말라는 위압으로 느껴진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이런 식으로 진실에 접근하려 하지 말라는 겁박을 할 수 있는 것인가.
기밀이어서 아무 자료도 보여줄 수 없으니 그냥 우리를 믿으라는 국정원의 모습에서 진실에 다가서려는 태도는 조금도 전해지지 않는다.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사실무근이라는 입장만 강변할 뿐, 자신들의 결백을 입증할만한 어떤 객관적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국정원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거짓의 세계를 이제는 진실이라고 스스로 믿는, 리플리 증후군에 걸린 것인지 모른다. 자신들만이 국가를 지키는 애국자이고, 따라서 자신들이 하는 일은 모두 국가를 위한 것이기에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망상증이 그것이다. 설혹 ‘지나친 욕심’이 있었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당당할 수 있는 것이 국정원의 모습으로 읽혀진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르메스는 목축, 웅변, 발명, 상업, 도둑, 거짓을 주관하는 신이다. 그는 세이돈에게서는 삼지창을, 아레스에게서는 칼을, 아프로디테에게서는 허리띠를 훔쳐냈다. 또한 아폴론이 돌보고있던 가축들 가운데 황금뿔이 달린 하얀소 50마리를 훔치기도 했다. 이에 아버지인 제우스는 그가 전령으로 임명받는 조건으로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할 것을 요구한다. 헤르메스는 이렇게 다짐한다.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않겠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깜빡 잊고 진실을 다 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할 수 없이 약속은 하지만, 빠져나갈 구멍을 미리 만들어놓는 수를 부리려 했던 것이다.
다시는 거짓된 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했던 국정원이지만 다시 거짓 논란에 휩싸여있다. 그러나 기밀이라는 이유를 앞세워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려는 모습만 보이고 있다. 진실하지 못한 ‘양치기 소년’의 말을 아무런 검증의 과정조차 없이 누가,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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