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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비평

KBS PD와 기자들이 가려는 아름다운 길

이제 KBS에서는 모든 것이 끝난 줄로 알았다. KBS 노조의 총파업 찬반투표가 부결로 끝난지 이틀 뒤, KBS 9시 뉴스에서는 ‘연탄나르는 김인규 사장님’의 모습이 등장했다. 자기들 사장의 봉사활동 장면에 대한 홍보를 버젓이 메인 뉴스에 내보내는 이 용감한 모습이야말로, 특보 출신 사장의 KBS 입성이 성공리에 끝났음을 말해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자신들의 사장이 대통령 특보 출신이라 해도, 그 사장이 기자 시절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찬양했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어도, 그런 사장을 인정하면 외부에서는 자신들을 향해 손가락질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도, 당사자들이 파업을 안하겠다는데야 도리가 있겠는가.

KBS 구성원들은 김인규 사장 반대를 위한 총파업 투표를 부결시켰다. 그것이 세상이 뭐라하든 자기들의 밥그릇만은 지키겠다는 이기심의 발로이든, 갈등 피로감에 따른 체념과 패배주의의 결과이든, 그들의 선택은 지켜보던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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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노조의 총파업 찬반투표 개표 장면 ⓒ KBS

어떻게 KBS가 저럴 수가. 훨씬 환경이 열악했던 YTN 노조조차도 특보 출신 사장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온몸을 던져 항거하며 거리를 떠돌았거늘.

1990년 노태우 정권의 서기원 사장 임명에 맞서 37일간의 제작거부로 수백명이 연행되고 14명이 구속되는 희생을 치르면서 방송민주화의 초석을 닦았던 KBS가 어떻게 이 지경이 되었는지. 자신들에 대한 야유와 손가락질을 뒤로 하면서도 태연히 공영방송임을 내세울 수 있는 KBS의 참담한 모습에 우리는 실망하고 좌절했다. 그래서 이제는 KBS에 대한 미련을 접자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나 보다. KBS의 PD들과 기자들이 패배의 아픔을 털고 다시 시작하겠다며 일어서고 있다. 이들은 현재의 노조집행부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제 현재의 노조를 탈퇴하고 새로운 노조를 건설하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그래서 뜻을 함께하는 많은 PD와 기자들이 속속 노조를 탈퇴하고 있는 상황이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KBS를 친정부적인 국영방송으로 만들려는 기도를 이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그래서 앞으로도 부당한 일들에 대해서는 계속 항거해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진다. 비록 숫적으로는 KBS 내에서 아직 다수를 차지하지 못할지언정, 신뢰받는 공영방송을 만들려는 불씨를 다시 살리는 움직임이 될 수 있기에 그에 거는 기대는 클 수밖에 없다.

물론 현재의 상황에서 그것은 몸부림의 차원일 수도 있다. 정권과, 그 지원을 받는 경영진을 상대로 힘을 겨루기에는 아직은 힘이 부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옳고 의로운 길이라면, 그러한 몸부림이 불씨가 되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낸 경험들을 우리는 수없이 갖고 있다. 지금은 힘들고 외로운 길이어도, 공영방송의 독립성을 지키려는 그들의 노력은 우리 방송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

KBS 파업 찬반투표를 앞두고 KBS 기자들이 낸 성명에는 “총파업만이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 말대로라면 KBS 구성원들은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지키지 않은 셈이다. 그래서 KBS의 PD들과 기자들이 국민에게 면목이 없게 되었다며, 다시 예의를 갖추기 위해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고 있다. 그들이 가려는 길에 국민의 성원이 함께 할 것임을 우리는 믿으며 무한한 격려를 보낸다.

그들이 가는 그 길은 진정으로 아름다운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