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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세월호 유가족을 심판하려는, 이것이 나라인가?

동진(東晉)의 군주 환온(桓溫)이 촉()을 정벌하기 위해서 많은 군사를 여러 척의 배에 태우고 삼협(三峽)’을 통과할 때, 병사 하나가 강가 벼랑 아래 덩굴줄기에 매달려있던 새끼 원숭이 한 마리를 잡아 배에 태웠다. 그때 이 광경을 본 어미 원숭이가 큰 소리를 지르면서 강가의 벼랑을 따라 배를 쫓아 수백리를 갔다. 마침내 배가 강기슭에 닿았을 때, 어미 원숭이는 환온의 배에 펄쩍 뛰어올랐으나 그대로 죽고 말았다. 어미 원숭이가 왜 죽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배를 갈라 보았더니,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 자식을 빼앗긴 슬픔이 너무 애통해서 그리된 것이다. 이 사실을 안 환온은 대노하여 병사를 엄벌에 처하고, 새끼원숭이는 풀어주었다.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아픈 슬픔을 뜻하는 단장’(斷腸)의 얘기이다. 

원숭이도 새끼를 빼앗긴 슬픔에 창자가 끊어질 정도인데 자식잃은 사람이야 오죽하겠는가. 더구나 환한 아침 시간에 아이들을 실은 배가 서서히 가라앉아 가는 장면을 지켜보아야 했던 세월호 부모들의 슬픔과 고통은 평생을 가도 지워지지 않게 되어있다. 적어도 자식을 애지중지 키워본 사람들은 그 마음을 안다. 그래서 유가족들의 요구가 지나친 것 아니냐는 언설들은 그 슬픔의 무게에 비하면 너무도 가볍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살릴 수 있었던 아이들을 그대로 바다 속에 가라앉게 만든 이유를 정확하게 알아야겠다는 부모들의 요구에는 금지선이 있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률이 막고 있지 않는한 누구도 그들의 요구를 지나치다고 탓할 수 없다. 여권세력이 그토록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는 유가족들의 요구, 진상조사위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보장해달라는 요구조차도 헌법과 법률에 위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은 의지의 문제이다. 유가족들은 진상을 규명해달라는 것이고, 여권세력은 그에 대한 의지가 없다는 얘기이다. 

딸 유민이가 죽어간 이유를 알기 위해 김영오씨는 목숨을 건 단식을 계속하고 있다. 아무리 병원에 입원해서 일단 위급한 상황은 넘겼다 해도 단식이 계속되면 생명을 지킬 수 없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다. 건강을 지키고 살아남아야 싸울 수 있다는 합리적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음을 각오한 단식을 계속하고 있는 것도 죽어간 유민이의 아빠이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수많은 유민이들의 죽음 앞에서 유난히도 가슴아파했던 것은, 우리가 그냥 지켜보는 가운데 아이들이 죽어가야 했던 상황에 대한 죄의식 때문이었다. 그런 자책은 단 한 번만으로도 지울 수가 없다. 그런데 다시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이를 잃은 아빠가 다시 죽음의 상황을 향해 조금씩 가고 있다. 국가가 구조의 책임을 방기한 가운데 우리는 아이들의 죽음을 구경해야 했었는데, 다시 국가가 구원의 책임을 방기한 가운데 유민 아빠가 죽음을 감수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다. 세월호의 침몰 상황과 너무도 닮은 꼴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아이잃은 부모들을 심판하자고 달려드는 무리들의 모습이다. 김영오씨의 노조원 신분, 이혼사실 같은 내용까지 들추며 시체장사라도 하고 있는 듯이 몰아가고 있는 세력들의 행태는 반인륜적이라는 말로는 비판의 의미를 다 담아낼 수 없다. 금속노조 조합원은, 이혼한 아빠는 자식을 잃어도 슬퍼하고 분노할 자격이 없다는 얘기인지. 세상에 아빠가 딸에 대한 사랑의 알리바이를 입증하기 위해 카톡을 공개하고 통장내역을 공개해야 하는 사회가 어디 있는가.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이 곳은 야만의 사회이다. 아이잃은 부모들의 슬픔과 분노를 껴안아주기는 커녕, 그들을 모략하고 심판하자고 나서는 자들이 활개치는, 이것이 과연 나라인가. ‘이것이 나라인가라는 이 질문은 416일부터 시작되어 오늘까지 되풀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 질문에 답을 내놓아야 할 사람은 오늘도 아무런 말이 없다. 그래서 참사는 아직도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