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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용산참사 장례식, 그 미완의 숙제

용산참사 철거민 희생자들에 대한 장례식이 근 1년 만에 치러졌다. 뒤늦기는 했지만, 이제라도 유족들과 정부 사이의 합의가 이루어져 장례식을 치른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사실상 유족과 정부를 대신한 범국민대책위와 서울시는 지난 연말 정운찬 총리의 사과, 유족 보상금 지급과 상가 분양권 지급, 유가족 병원비 지급 등을 골자로 하는 합의안을 도출했다. 쟁점이 되었던 진상규명 등의 부분은 합의에서 빠졌지만, 이 정도면 정부도 유족 측의 요구를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유족들의 요구를 거부해왔던 정부도 용산참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채 새해를 맞는데 대한 부담을 의식하여 전향적인 입장 변화를 보인 것으로 해석된다. 유족들의 입장에서도 수사기록 공개 등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고인들을 보내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장례식까지 치러짐에 따라 용산참사는 사건 발생 355일만에 표면적으로는 일단락되게 되었다.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운구행렬 ⓒ 유성호

그러나 장례식이 끝났다고 해서 용산참사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용산참사와 같은 비극이 다시는 생겨나지 않기 위해서는, 아직 해결되지 못한 과제들이 무엇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난 과정에서 무엇보다 유감스러운 것은 용산참사 문제 해결에 성의를 보이지 않은 정부의 태도였다. 정부는 그동안 용산참사는 ‘사인(私人)간의 문제로 중앙정부가 나설 일이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무리한 진압과정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빚어졌는데도 정부는 불법 농성자들의 책임만 부각시킬 뿐, 자신의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경위야 어찌되었든간에, 생존권을 다투던 사회적 약자들의 처참한 죽음을 앞에 놓고도 정부는 진정으로 가슴아파하거나 자책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합의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정부의 시각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합의의 주체는 ’정부‘가 아닌 ’서울시‘였고, 사과의 주체 역시 ’이명박 정부‘가 아닌 ’정운찬 총리‘였다. 그러하기에 정운찬 총리의 ’유감‘ 표명 속에 과연 이명박 정부의 진심이 얼마나 담겨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예기치 못했던 참사 앞에서 유족들의 손을 잡고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그런 정부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냉정한 법의 논리만을 신봉하던 정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런 모습을 바꾸지는 않았다. 용산참사의 장례식조차도 경찰의 삼엄한 통제 속에서 치러져야 했던 장면이 이를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범국민대책위와 서울시 사이에 이루어진 합의는 장례식을 치르기 위한 합의이지, 용산참사 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위한 합의라고 하기는 어렵다. 우선은 진상규명의 과제가 남아있다. 현재 법원에서 고려하고 있다는 검찰의 수사기록 공개가 이루어지면 당시의 참사 상황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재개발 과정에서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제도개선의 노력이 따라야 한다. 용산참사 직후부터 제도개선의 다짐은 곳곳에서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이를 위한 정부와 정치권의 논의는 뚜렷한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재개발 과정에서의 불행한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제도개선의 노력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또한 구속기소된 철거민들이 불구속으로 재판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정부의 노력도 필요해 보인다. 현재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철거민 가운데는 아버지가 희생된 사람도 있다. 용산참사가 농성 철거민들의 삶을 가혹하게 파괴시켰음을 생각한다면 이들을 가해자로만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최대한 법적 관용을 취해야 합의의 정신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용산참사는 그동안 우리 사회 갈등의 상징으로 자리해왔다. 장례를 치렀다고 모든 아픔과 상처가 치유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합의문의 문구보다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했던 갈등의 흔적을 지워내는 일이다. 다시는 철거민들이 망루에 올라가는 비극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진심이 담긴 정부의 후속 조치들이 더 필요하다. 그래야 용산참사는 완전한 해결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 이 글은 <국제신문> 1월 11일자 시론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