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으라.”
세월호에 타고 있던 학생들은 그 어처구니없는 말을 따르다가 바다 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선내 방송을 통해 나온 그 말만 없었어도 아마 많은 학생들이 살아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가만히 있으라”는 이 말은 학생들을 수장시켜 버린 어른들의 무책임성, 실종자들을 단 한명도 구해내지 못한 정부의 무능을 역설적으로 비판하는 의미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그래서 시민들은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가만히 있으라’ 행진을 벌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9일 청와대에서 열린 긴급 민생대책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사회 불안이나 분열을 야기하는 언행들은 국민경제에 전혀 도움이 안 될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우리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고 말했다. “최근 세월호 사고 여파로 소비심리 위축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는 우려를 표하기도 했고, “경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 심리가 아니겠는가. 이 심리가 안정돼야 비로소 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고도 했다.
대통령의 발언이 겨냥하고 있는 바는 분명해 보인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최근 확산되고 있는 정부책임론과 정부비판이 사회불안과 분열을 야기할 수 있고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에 대한 추모 분위기의 장기화로 소비가 위축되어 역시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니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의미로 해석된다.
박 대통령은 자신도 말했듯이 이번 참사에 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여론에 떠밀려 뒤늦게 대통령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책임을 지는 시작일 뿐, 결코 끝이 아니다. 그가 져야할 무한책임의 무게를 생각한다면 아직 최소한의 책임도 지지 않은 대통령의 입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생명에 대한 국민적 추모를 경제논리를 앞세워 억제하려는 것이나, 참사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비판하는 것을 분열과 불안이라는 말로 폄하하는 것은 무한책임을 느낀다던 대통령이 할 얘기가 아니다. 바로 돈의 논리를 앞세워 인간의 생명을 뒷전으로 밀어버렸던 그같은 생각들이 세월호 참사를 낳았다는 점을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자백일 뿐이다.
대통령이 소비위축을 우려하는 말을 꺼내니까 받아쓰기에 익숙한 언론들도 세월호 참사로 인한 소비위축의 실태를 경쟁적으로 보도하고 나선다. 아직도 29명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참사의 원인과 책임을 밝히지도 못했는데. 경제도 어렵고 하니 이쯤에서 덮고 이제 그만 잊자는 얘기와 다를 바가 없다.
같은 날 안산의 고등학생들은 희생된 친구들을 추모하는 촛불문화제를 가졌다. 이 문화제의 주제는 다름아닌 “잊지 말아주세요”였다. 학생들은 이제 월드컵도 열리고 아시안게임도 열린다면서 친구들의 죽음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질까봐 두렵다고 절규했다. 그러나 이 나라의 대통령과 정부는 이쯤에서 잊으라 한다. 참으로 부끄러운 나라이다.
세월호 승무원들의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듣다가 학생들이 죽었듯이, 대한민국호의 선장과 승무원들이 꺼내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듣다가는 이제 또 다른 우리의 아이들이 죽는다. 그래서 우리는 선언해야 한다.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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